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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동아시아 부패의 기원

바보야, 문제는 불평등이야

 

이승원 / KSOI 기획위원

 

부패는 전쟁과 함께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숙제 가운데 하나다. 전쟁의 폭력성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면 부패는 사회를 좀먹는다. 한자로 부패는 썩을 부(腐), 무너질 패(敗), 썩어서 무너진다는 뜻이다. 영어도 다르지 않다. Corrupt는 라틴어에서 ‘함께’를 의미하는 Cor와 ‘파멸하다’는 Rupt가 모인 단어다. 즉, 함께 파멸하는 것이 부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회가 망하는 것으로 부패를 인식하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부패척결에서 척결(剔抉)은 썩은 살을 긁어내고 뼈를 발라낸다는 뜻임을 감안하면 그만큼 부패는 뿌리가 깊고 제거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민주국가로 출발한 세 국가(한국, 타이완, 필리핀)의 부패의 기원을 다루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평등은 선거에서 후견주의를 증가시켜 정치부패를 야기하고, 관료채용에서 엽관주의를 증가시켜 관료부패로 이어지고, 민간영역에 의한 국가포획을 증가시켜 기업부패로 이어져 반부패 개혁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비효율성을 증가시킨다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세 국가에서 나타나는 부패의 정도는 서로 상이하다. 우선 세계경제포럼의 연례 경영자 설문조사(2003∼2011)1 ,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CPI: Corruption Perceptions Index)2 와 세계은행의 부패통제지수(CCI: Control of Corruption Index)3 에서 나타난 세 국가의 수치를 비교하면 필리핀이 가장 부패했고 타이완이 가장 덜 불패했고 한국은 두 국가 사이에 위치하지만 타이완 쪽에 더 가깝다. 그러면 무엇이 세 국가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것이 이 책의 주된 질문이자 주제다. 

 

그동안 동아시아 국가에서 부패의 원인을 문화 또는 사회규범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교적 권위주의, 확대가족과 선물증여에 대한 아시아적 문화, 중국인들의 꽌시(關係)와 같은 족벌주의, 정실주의는 이탈리아의 크로니즘(cronyism)과 곧잘 비교되었다. 그러나 문화적 설명은 프라나브 바단(Pranab Bardhan)의 지적처럼 “어떤 국가는 더 부패했다. 왜냐하면 이 국가의 규범들이 부패에 더 우호적이기 때문이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한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존 쿠아(Jon S.T. Quah)는 몽골, 인도, 필리핀, 싱가포르, 홍콩, 한국의 반부패 노력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관공서의 불필요한 요식들이 제공하는 부패의 기회, 관료의 급여, 부패 행위의 탐지 및 처벌가능성 등을 부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으며 부패를 없애려는 반부패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주장은 어떤 사회적 조건들이 반부패를 지향하는 정치적 의지로 이어지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아시아 부패의 기원: 문제는 불평등이다. 한국, 타이완, 필리핀 비교연구.
유종성. 김재중 역. 2016. 동 서울: 동아시아.

 

 

 

정치적 후견주의와 정치부패

 

여기서 저자는 후견주의와 포획이 부패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즉, 후견주의적 정치인들은 자원의 상당부분이 부패한 수단에서 오기 때문에 부패와 맞서 싸우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할 개연성이 높고 포획된 정치인들 역시 어떤 형태의 부패가 포함되더라도 포획자의 이득에 봉사하려 할 것이다. 칼 랜드(Carl Lande)와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은 후견주의가 정책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프로그램 정치발전을 방해하고 후견주의적 경쟁이 지배하는 선거부패의 모델로 필리핀을 지목한다. 저자는 이들이 분석한 사회적, 문화적 요인에 따른 후견주의와 포획이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부패를 조장하는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먼저 불평등이 높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평등 수준이 높은 국가에서는 후견주의에 취약한 인구가 더 많다. 동시에 부자들은 프로그램 경쟁보다는 후견주의에 의존한다. 후견주의 정치는 공급(부자, 엘리트)과 수요측면(빈자) 모두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고무하고 프로그램 정치발전을 가로막는다. 또 불평등 수준이 높을수록 엘리트에게 돌아가는 몫과 기대수익이 커지기 때문에 포획이 일어날 가능성도 더 커진다. 즉, 후견주의는 선거부패와 엽관직 제공을 포함해 정치부패와 관료부패를 촉진하며 정부 또는 정부기구가 엘리트 이익에만 봉사하는 높은 수준의 기업부패와 정치부패로도 나타난다. 따라서 불평등이 높은 상황에서 부패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민주화가 오히려 부패를 증가시킬 수도 있다. 이를 인과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면 다음의 그림과 같다. 

 




토지개혁과 불평등

 

보다 실증적인 분석을 위해 저자는 1945년 세 국가의 독립초기로 돌아가 본다. 먼저 토지개혁을 살펴보자. 저자는 토지개혁을 부패와 불평등의 기원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토지개혁의 성패가 서로 다른 불평등 수준을 생산했고 이는 다시 부패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면 토지개혁의 성공은 불평등의 수준을 낮추었고 부패가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으나 반대로 토지개혁의 실패는 불평등 수준을 높였고 부패 역시 증가시켰다는 논리다. 물론 부패의 수준이 토지개혁에 영향을 미쳤고 불평등을 조장했다는 논리도 성립한다. 그러나 1945년 당시 세 국가 모두 높은 부패 수준을 보였음에도 토지개혁의 성패를 가른 것은 부패 수준보다는 공산주의 위협과 미국의 압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럼 지금부터 세 국가의 토지개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되짚어 보자. 1945년 독립 당시 한국, 타이완, 필리핀은 토지 지주 계급이 부와 권력을 보유한 전통사회였다. 한국은 상위 2.7%가 경작 가능한 토지의 2/3를 소유한 반면 58%는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1945년 미 군정에 의해 처음 수행된 남한의 토지개혁은 소출 작물의 1/3로 소작료를 제한하고 제헌의회의 농지개혁 프로그램에 따라 많은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농지를 직접 팔았다. 소작인이 경작하던 전체 농지의 89%가 1952년까지 소작인에게 이전되고 1949년 49%에 달하던 소작농은 1964년 5.2%로 급감한다. 1945년 65%에 달하던 소작 토지도 1951년 8%로 떨어진다. 그 결과 자작농은 1945년 13.8%에서 1964년 71.6%로 급증하고 1956년 최상위 6%가 개간된 토지의 18%만 소유하는 구조로 농촌계급구조는 근본적으로 바뀐다. 

 

이처럼 극적인 토지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분석에 큰 이견은 없다. 이 점은 미 군정과 농지개혁법안 제안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난다. 1946년 3월 5일 소련이 점령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기반한 토지개혁을 선언하자4 3월 9일 미 군정 존 하지(John Reed Hodge) 장군은 토지개혁안을 발표하고 3월 15일 민정장관인 아처 러치(Archer L. Lerch) 장군은 신한공사가 보유한 과거 일본인 보유토지 매각계획을 공개한다.5  대중의 토지개혁에 대한 열망과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응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제임스 풋젤(James Putzel)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토지 재분배 정책은 농촌지역에서 공산주의 주도의 선거 보이콧을 저지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한다. 제헌의회 역시 조봉암 초대 농림부 장관의 제안에 근접한 150% 보상과 상환을 규정한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켜 토지 재분배를 실행한다.6  물론 이 개혁은 1950년 5월 30일 2대 총선을 앞두고 토지개혁을 실행해 지주들이 주도하는 한민당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계산도 있으나 북한의 주된 선전인 토지개혁에 대응하려는 의도가 주를 이룬다. 미국도 북한의 위협에 맞대응하려는 고려에 따라 이승만 정부에게 신속한 토지개혁의 실행을 권고한다. 

 

타이완의 농지개혁 프로그램은 1949년 소작료를 수확량의 37.5%로 제한하고 소작료를 내기만 하면 6년간 소작을 보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공공토지 매각, 경자유전 프로그램 등 3단계로 실행된다. 이 개혁의 배경에는 중국 본토에서 농민을 소외시켜 공산당에게 뺏긴 국민당 지도부의 반성과 농촌지역에 침투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시도를 물리치려는 고려가 반영된 결과다. 특히 일본 토지개혁에서 중요 역할을 담당했던 울프 라데진스키(Wolf Ladejinsky)의 권고에 따라 각 마을마다 농지소작위원회를 구성하는데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소작농과 지주 사이 총6만2,645건의 분쟁을 해결해 토지개혁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51년에는 과거 일본인 소유 토지를 매각해 타이완의 경작 가능한 토지의 8.1%가 소작농에게 돌아간다. 수확량의 2.5배를 10년 동안 현금 또는 현물로 갚는, 소작료보다 싼 조건이었다. 1953년 장제스(蔣介石) 대통령은 경자유전 법안에 서명하며 마지막 3단계에 접어든다. 모든 지주에게 3치아(1치아=0.9699헥타르)를 초과하는 땅은 정부에 팔도록 하고 정부는 이것을 소작농에게 되팔았다. 이 결과 0.5∼3치아 중간규모 토지를 소유한 가구비율이 1952년 46%에서 1960년 76%로 늘어나고 자작농은 1950년 36%에서 1960년 64%로 증가한다. 반면 소작 토지는 1948년 44%에서 1959년 14%로 감소해 토지소유구조는 극적으로 변한다. 

 

필리핀의 토지개혁은 꾸준히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좌절한다. 미국식민지배기간(1898∼1941) 카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던 16만6천헥타르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수도원토지법(1903년)을 제정했으나 비싼 가격으로 인해 대부분 부유한 지주나 미국 기업의 소유로 넘어가며 1903년 18%이던 소작 비율은 1933년 35%로 증가한다. 1946년 미 국무부는 한국, 타이완, 일본의 토지개혁 사례를 들어 필리핀 정부에게 토지개혁을 권고하고 1952년 훅스(Huks) 인민해방군 주도의 무장 농민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필리핀 소작농 70%에 토지를 재분배하는 ‘하디 보고서’를 제안하지만 의회는 물론 카리노 대통령은 국가적 모욕이라며 거절한다. 1953년 농업개혁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막사이사이는 농업소작법과 토지개혁법을 제안하나 의회는 예산을 할당하지 않고 토지소유 제한을 느슨하게 설정해 경작 가능한 토지의 2%만 재분배 대상이 되게끔 무력화시킨다.7  1963년 마카파갈 대통령은 벼와 옥수수를 재배하는 25헥타르 이상 토지를 재분배하는 법안을 제안했으나 의회는 200개가 넘는 수정조항을 추가해 통과시킨다.8  이는 1965년 대통령 선거에서 소작농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법안을 만들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라 할 수 있다. 1972년 9월 마르코스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 후 대통령령(PD27)으로 토지개혁을 선포해 사유지 31만5천헥타르를 수용하나 이는 필리핀 전체 경작지 4%에 불과한 땅이었고 혜택을 받은 가구도 16만8천 가구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농업개혁부 공무원들이 지주에게 매수되어 지주의 대상토지를 면제토지로 분류하거나 소작농과 수혜자에게 사정가보다 평균 44% 비싼 가격으로 매입할 것을 종용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마르코스 정권은 정적들의 소유토지를 수용해 빼앗는다거나 소작료 상한선(25%)을 초과해 거두는 한편 PD27 적용을 피하기 위해 소작농을 내쫓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편법으로 농촌가구 1.5%가 필리핀 전체 경작지의 50%를 소유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과 타이완은 북한과 중국 본토로부터 공산주의 위협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토지개혁을 상정하는 강한 동기를 가졌으나 필리핀은 이러한 위협이 없었다. 미국 역시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토지개혁 추진을 강하게 압박한 반면 필리핀에서는 로버트 하디가 매카시즘에 휘말려 본국에 소환되며 흐지부지되고 만다.


토지개혁의 사회적 효과 

 

토지개혁이 이들 국가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우선 토지개혁은 농촌 빈곤을 경감시키고 전반적인 소득불평등을 현저하게 감소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는 급속한 교육확장으로 이어져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음에도 초등학교 진학률은 1945년에서 1955년 사이에 두 배 늘었고 같은 기간 중등학교 진학률은 8배 이상, 전문대학과 대학교 진학률은 10배 이상 증가한다. 또 토지개혁과정에서 지주들이 토지 수용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토지를 교육기관에 기부한 것도 더 많은 사립대학교와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되는 토대가 된다. 토지개혁으로 교육의 수요와 공급 모두 증가한 셈이다. 타이완 역시 1950년 중등학교 진학률이 11%에 불과했으나 1960년에는 29%로 증가하고 같은 기간 전문대학이상 고등교육기관 진학인원은 3배 이상 늘어난다. 1950년 필리핀은 초·중·고교 진학률과 평균 교육 수준은 한국이나 타이완보다 높았으나 1960년에 이르자 초등학교 진학률에서 한국과 타이완은 필리핀보다 높아졌고 중등 이상 교육과정 진학률은 비슷해진다. 그 이후 한국과 타이완은 필리핀을 추월한다.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토지계급이 해체되고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전환됨에 따라 교육이 급속히 확대되고 그 결과 읽고, 쓰고, 계산능력이 있는 노동자가 풍족해져 산업화로 이행할 수 있었던 반면 필리핀에서는 토지 엘리트를 그대로 유지시켜 이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확장되는 대조를 이룬다. 나아가 토지계급 해체는 국가자율성을 확립하고 부패를 통제할 수 있게끔 긍정적 영향을 미친 반면 필리핀에서는 정치적 후견주의와 엽관주의로 이어져 산업성장을 방해한다.

 

후견주의와 정치부패

 

그러면 이 세 국가에서 불평등이 어떻게 후견주의와 정치부패에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자. 세 국가는 모두 1980년대 후반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한 공통점이 있다. 필리핀은 한때 민족주의당과 자유당이 주기적으로 정권을 교체해 한동안 성공적인 제3세계 민주주의 사례로 평가받았으나 토지 엘리트 가문들이 정치는 물론 경제까지 지배함에 따라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후견-고객관계가 정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마을 지도자는 부유한 농민이고 시장은 소규모 지주 또는 전문가 출신이다. 주지사는 거대 지주 계급이고 의원은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다. 지방부터 중앙정치로 이어지는 후견주의 연결망은 선거를 거치며 확장된다. 스콧의 표현대로 필리핀은 선거부패의 모델로 대부분 의원들은 유권자의 노골적인 매표에 의존해 후보의 선거자금 가운데 가장 큰 몫은 마을 지도자에게 건네고 이들은 일부를 자신의 몫으로 챙긴 후 나머지를 유권자에게 뇌물로 주었다. 이러한 정치적 환경은 당선 후 정치인들이 부정거래에 관여하게 만든다. 일예로 1969년 대통령과 하원의원의 총 선거비용은 그해 국가예산의 1/4에 이를 정도였다. 아키노 정부 초대 회계감사위원회 의장을 지낸 테오피스토 깅고나(Teofisto Guingona)는 마르코스가 1986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국고에서 약 1억5천만달러를 인출했다고 추산한다. 매표뿐만 아니라 유권자 선거권 박탈, 협박과 폭력, 투표수 조작 등 선거부정에 분노한 시민들이 마르코스를 몰아나며 극적인 전환을 이루었음에도 필리핀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여전히 부유한 토지 소유 엘리트들이 의회를 장악한 상태다. 15대 국회(2010-2013)에서도 구성원의 70%가 정치가문출신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에도 프로그램 경쟁보다 후견주의 경쟁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선거구민의 장례식, 결혼식, 세례식 참석과 기부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공공사업 및 고속도로부 예산의 19.1%는 의원들의 선심성 예산으로 할당되었다. 정당은 유력 가문들 사이의 연합이 되었고 이들이 정치를 좌우하다보니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7%, 3명 중 2명은 복지를 대변해주는 정당은 없다고 답변해도 이상하지 않다. 

 

한국도 권위주의 여당과 친민주주의 야당 사이의 경쟁을 기본구도로 협박, 매표, 금품과 향응제공, 투표수 부풀리기 등 선거부정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1960년 대규모 선거부정은 학생시위로 이어져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뒤이어 장면 정부가 들어서나 박정희의 쿠데타로 단명하고 만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반공, 경제발전, 부패척결로 자신의 쿠데타를 합리화했으나 선거부정은 계속된다. 심지어 공화당은 ‘시의적절하고 효율적인 선거 자금 분배’가 대통령 선거와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화당보다 관료와 중앙정보부, 군대에 더 의존한다. 특히 유신헌법은 그의 종신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그에게 국회의원 1/3 지명권을 부여한다. 대통령에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이다. 즉, 한국에서 후견주의는 자원의 모집과 분배가 독재자에게 집중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대통령 선거를 폐지했음에도 부하들의 충성을 보장하고 야당 정치인에게 뇌물로 통제하기 위해 막대한 정치자금을 필요로 했고 심지어 미국 하원의원들에게까지 뇌물을 주어 소위 ‘코리아게이트’ 스캔들로도 이어진다. 암살로 막을 내린 박정희 체제에 뒤를 이어 광주에서 무자비하게 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은 전체 유권자의 6.5%에 달하는 160만 당원을 모집하고 당원 연수를 후원하는데 이때 참석한 이들에게 즉석에서 당원 자격을 부여하고 10만원씩을 주었다. 선거철이면 공짜 여행을 보내주거나 비밀리에 현금이 담긴 흰봉투를 돌렸으나 갈수록 선거조작이 어려워진다. 도시화, 교육확대, 중산층이 증가하고 후견주의 자원이 거의 없던 야당의 친민주주의 강령이 호소력을 갖자 여당의 후견주의 전략의 효용성이 감소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역감정에 기반을 둔 지역동원이 새롭게 등장하지만 야당 후보조차도 후견주의적 경쟁에 의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실질적인 정치개혁이 진행됨에 따라 후견주의적 관행은 점차 줄어든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선거운동기간동안 돈, 선물, 음식, 여행을 제공받았다고 시인한 유권자 비율이 1992년 12%에서 1997년 3%로 줄어든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합당과 분당, 당명개정이 빈번했지만 보수와 자유주의정당 구분은 분명했고 정당지도자가 선거후보를 선택하던 방식에서 예비선거를 통해 선출하는 프로그램 경쟁방식으로 전환을 이루며 후견주의적 정치는 점차 쇠퇴다. 

 

타이완은 전통적으로 지주들이 마을지도자였으나 토지개혁 이후 경제적 기반을 상실함에 따라 힘을 잃고 동료보다 시간과 돈이 더 많고 자신의 지위를 끌어올리려는 열망이 있는 마을 사람이 지방파벌 지도부를 이룬다. 초기 국민당은 모든 관청에서 타이완인들을 강제로 쫓아냈으나 지방직은 타인완인에게도 허용한다. 지방선거를 허용해도 국민당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과 함께 붉은 중국(Red China)에 맞서는 자유중국(Free China)의 상징을 유지해야 국제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국민당은 지방파벌에 크게 의존했는데 이들은 마을 선거브로커를 동원해 선거를 치렀다. 본토인들로 구성된 국민당과 지방 주민 사이에 간극과 연계망을 이들이 채운 셈이다. 이들은 주로 유권자 사이에서 지연, 혈연, 동업자 의식, 학연, 콴시에 기반하거나 현금을 주고 매표해 국민당의 선거 승리를 이끈다. 풀뿌리 선거투표율이 총선투표율보다 높았다는 사실은 후견주의 동원(유권자-선거브로커-후보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했는지 보여 준다. 국민당 후보들이 후견주의 동원전략에 의존한 반면 당외 후보들은 민주화와 민족정의라는 쌍둥이 테마에 기반한 선거전략을 채택한다. 1986년 최초로 공식 야당인 민진당이 창당되고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타이완은 민주화로 접어든다. 재미있는 사실은 매표가 하위 수준 선거에서는 잘 작동한 반면 높은 수준의 선거에서는 갈수록 국민당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일예로 1993년 현 행정관 선거에 대한 현장조사에서 국민당에게 표를 판 유권자의 45%가 실제로는 국민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매표의 효율성은 감소하고 후견주의 비용은 증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당의 후견주의 전략은 부유한 기업가와 폭력배 출신 정치인을 증가시켜 1996년 법무장관 랴오 정하오(廖正豪)는 시의원과 현의원 858명 가운데 286명, 지방의원 25%와 국회의원 5%가 폭력배 또는 범죄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 후보자들이 선거브로커를 감시하고 경쟁자를 몰아내기 위해 고용한 폭력배가 선거과정에 친숙해지자 후보로 나서 의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국민당의 만연한 흑금정치(黑金: 검은돈)는 2000년 민진당 천수이벤 후보가 내세운 반부패가 설득력을 얻고 정권교체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된다. 왕과 쿠르즈만에 따르면 2001년 법무장관 청딩난(陳定南)이 매표를 엄격하게 금지하자 많은 지방파벌과 선거브로커가 해체된 것으로 분석한다. 실제 2004년 총선에서 흑금정치인으로 지목된 국민당 정치인은 선거에 나서지 못했고 선거운동도 흑금 관행에서 벗어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지방파벌이 약화되고 매표가 줄었지만 낡은 관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매표 형태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더욱 정교해졌고 만찬이나 여행으로 교묘하고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나 매표와 후견주의 정치의 효율성의 감소는 뚜렷했고 정당지향적이고 이슈에 기반한 프로그램 경쟁이 타이완 정치에 자리 잡는다. 

 

세 국가 모두 장기간 후견주의에 기반한 정치 이루어졌으나 민주화 이후 진행과정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불평등이 엘리트로 하여금 후견주의 정치를 채택하는 유인효과가 있고 후견주의에 감염되기 쉬운 대규모 빈곤층을 정치부패의 요인으로 꼽는다. 즉, 필리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고 표를 팔려는 성향이 높게 나타나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후견주의가 이어지는 배경이 되는 반면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토지개혁 이후 공평한 성장, 급속한 도시화, 교육의 확대 등에 따라 유인효과가 적어 후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보면 한국이 후견주의와 엽관주의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정치자금으로 의원을 통제하던 행태가 공천권을 놓고 여전히 행해지고 공무원은 인사권으로, 기업은 특혜로 통제되고 있어 겉으로는 후견주의와 엽관주의에서 벗어난 듯 보여도 여전히 위력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후견주의 정치인은 후견주의 목적을 위해 관리 채용과 승진에 영향을 미치려 노력할 것이고 후견주의를 통해 자리를 획득한 관료들은 후원자를 지원하고 보답하기 위해 부패에 참여할 유인이 늘어난다는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 즉, 후견주의는 정치부패뿐 아니라 정책실행과정에서 엽관주의와 관료부패로 이어지는 것이다.

 

엽관주의와 관료부패

 

필리핀은 후견주의가 어떻게 엽관주의와 관료부패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다나오(Danao) 시에서 두라노(Durano) 가문은 시장에서부터 학교 청소부에 이르기까지 공공일자리를 모두 독차지했고 마르코스 대통령은 가족과 측근들을 고위직에 임명한다. 부인인 이멜다 마르코스는 수도 마닐라 지사와 주거부 장관에 임명했고 이멜다 오빠는 관세청과 일반감사위원회, 국세청을 관장했으며 여동생은 중앙은행과 농업부에, 마르코스 남동생은 의료위원회에, 어머니는 쌀·옥수수 관리국을 관장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비대한 정부를 축소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명의 공무원을 해고하고 공석이 된 자리를 사적 인연에 따라 충원하는 일이 반복되며 아시아개발은행(ADB)은 국장급까지 정치적으로 임용되는 유일한 국가로 필리핀을 지목한다. 이처럼 정치적 임용이 남발됨에 따라 2007년 13부처의 차관과 차관보 수가 법정한도인 131명을 넘겨 222명에 이른다. 81명이나 초과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56%는 경력간부 자격이 없는 이들로 후진적 관료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하 하겠다.

 

한국은 박정희 정부에서 능력있고 자율적인 관료제를 구축했다는 평가와 함께 박정희의 발전주의 리더십의 핵심으로 평가하지만 저자는 반론을 제기한다. 한국에서 능력주의 관료제는 점진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발전한 것이란 주장이다. 주로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행시 합격자의 고위 공무원 확대비율(4.1%→20.6%)을 비교하며 박정희의 비교우위를 설명하나 이는 정부수립 당시 특수성을 간과한 것으로 초기에는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행시를 급속히 확장시킬 수 없어 특채에 의존해야 했다. 이승만 정부 후기(1953-1959)에는 행시를 통한 임용 비율이 절반까지 빠르게 상승한 점은 내부 승진을 갖춘 관료의 숫자가 증가한 결과로서 엽관주의로만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은 군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관직으로 보상하고 군복을 벗고 관료가 된 사람들을 통해 관료사회를 통제해 능력주의 구축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 1961∼1965년 사이 전역군인 특채는 21%에 이르며 1977년부터는 이른바 ‘유신사무관’으로 불린 군인특채를 제도화한다. 대체로 경제부처는 전문성을 유지하고 그 외는 엽관주의 임용을 하는 ‘양갈래 관료제’라는 분석이 박정희 정권의 공무원 임용의 특성을 잘 나타낸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능력주의에 기반한 관료제는 더욱 발전했다. 유신사무관제도는 폐지되었고 5급 행시 채용은 70%를 넘는 등 전문관료제가 발전한다. 2010년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특별공모가 사회문제화 된 사례나 박근혜 대통령의 사적 인맥이 국정을 농단한 사실에 국민이 분노한 것도 능력주의 원칙에 어긋난 족벌주의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이완 역시 유능한 관료제를 바탕으로 성장을 이룬 발전국가로 간주된다. 이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전통적으로 중국 본토출신의 관료들은 타이완 중앙과 지방정부에서 고위와 중간자리 대부분을 차지했고 중간 이하 등급은 대부분 타이완인들로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인에게 훈련받은 이들이 1960년대까지 지방정부에 몰려 있었다. 특히 고위관료는 본토인에 한정되어 있었고 국민당 엘리트와 전역장교를 위한 이른바 ‘뒷문시험’과 본토인 후손을 위한 특별지방할당 등의 조치로 직업공무원은 한국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제기관에서는 당 간부나 전역군인의 뒷문 채용이나 본토인 특별할당은 없었다. 이러한 능력주의는 민주화와 함께 한층 발전한다. 국민당원과 군인을 위한 뒷문 채용 관행은 사실상 사라졌고 2009년 공무원 중립법 제정으로 전문관료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전후 세 국가에서 관료제는 뚜렷하기 대비된다. 필리핀은 정치와 경제영역에서 지주 과두의 우세가 선거 후견주의와 엽관주의로 이어지고 한국과 타이완에서는 점진적으로 능력주의가 발전했다. 특히 관료제가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기존의 분석에서 토지개혁의 성공이 엽관주의 압력을 제거하고 공무원의 능력주의 채용에 대한 압력을 증가시켰다는 분석은 저자의 주요성과라 할만하다. 그러나 산업화 발전시기 많은 이들이 행시, 사시, 외시 등 국가시험에 도전한 것은 단순히 교육의 확장과 능력주의 채용 원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공무원 시험에 통과한 자는 최고이자 똑똑하다는 유교적 전통과 인식이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으며 전문관료가 갖는 사회적 권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또 안정적 직장으로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현실은 저자의 분석과는 동떨어진 측면도 있다. 관료제 발전에서 공무원 시험이 갖는 의미는 추가 연구가 필요다.

 

관료제와 국가포획

 

마지막으로 불평등과 부의 집중이 지대추구와 포획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자율적인 국가는 일관적인 산업정책을 채택하고 지대추구와 부패를 억제하기 위해 그 정책들을 공평하게 추진할 것이다. 반면 포획된 국가는 포획자에게 지대를 부여하기 위해 일관성 없이 정책을 도입하고 추진할 것이다. 필리핀은 강력한 지주 엘리트들이 상업, 산업, 금융, 정치로 분화됨에 따라 국가는 이들에게 광범위하게 포획되고 일관된 정책을 수립하거나 실행할 수 없었다. 반복된 토지개혁의 실패는 포획된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개혁이 번번이 좌절된 이면에는 강력한 엘리트 이익집단의 지대추구가 존재한다. 특히 마르코스 이후 의원 대부분은 기업과 이해관계를 공유한 이들이다. 코로넬(Coronel)의 연구에 따르면 하원의원의 상류층 출신 비율은 1962년 27.6%에서 1992년 44%로 증가한 반면 중상층은 62.1%에서 49.2%로, 중하위계급은 10.3%에서 6.6%로 줄어들었다. 마르코스 정권은 ‘모든 권력과 혜택을 전용해온 과두제로부터 국가를 구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언하고 수출촉진과 수입대체보호를 내걸었으나 1993년 월드뱅크(World Bank) 통계에 따르면 1970년에서 1980년 사이 수입제한 물량은 2배 늘었고 GDP 대비 수출은 1972년 13.1%에서 1980년 16.4%로 소폭 상승했을 뿐이다. 오히려 수출보조금은 가족대기업과 마르코스 측근들에게 제공되어 국가외채만 증가시켰다. 1990년대 자유화 개혁의 지지자들은 금융자유화가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과두제를 재선할 것으로 주장했지만 경제성장은 이웃 동남아 국가들보다 낮았고 빈곤율은 2006년 전체인구의 32.9%로 개선되지 않았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일부 평론가는 필리핀의 견고한 금융시스템으로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외국투자자자들에게 큰 매력이 없어 자본 유입이 적었고 급격한 자본유출이 적었다는 히켄(Hicken)의 분석은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경제자유화는 다각화한 가족 대기업의 부의 집중을 줄이지도 시장경쟁을 강화시키지도 못했다.

 

지주 엘리트의 해체와 강력한 산업자본가의 부재는 한국이 국가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여기에 능력주의 관료제의 점진적 성장은 국가자율성과 능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러나 박정희의 산업화 전략은 대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한국의 산업정책은 재벌에 포획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특히 박정희는 수출실적에 기초한 특혜를 제공해 기업을 통제했고 일본산업을 모방하고자 하는 박정희의 선호와 무기를 자체 생산하려는 욕망은 중화학공업에 대규모 투자하는 정책결정으로 이어진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드라이브는 과잉투자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철강, 조선, 전자, 자동차, 석유화학 등 한국의 산업기반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분석에 큰 이견은 없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전두환 정권에서 10대 재벌의 총자산 증가는 엄청났다. 대우 3.3배, 삼성 4.8배, 금성 3.9배, 현대 2.7배 등 재벌의 경제적 규모와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오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정권은 출범과 함께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며 기대를 모았으나 삼성이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세우기 위한 로비를 펼치자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승인한다. 무엇보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앞세워 재벌에게 해외로부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나 단기외채가 쌓이면서 아시아 금융위기가 닥치자 손써볼 겨를도 없이 무너진다. IMF 외환위기 이후 자유주의 정부와 노동조합, 시민단체로 이루어진 개혁연합은 재벌에 의한 국가포획을 막았고 권위주의적인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과 재벌에 의해 지배되는 독점적 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을 이루는 ‘이중전환’이 이루어진다. 특히 대우의 몰락은 ‘대마불사’ 정책의 종말을 시장에 알리는 강력한 신호였다. 그러나 재벌의 소유구조 개선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재벌 가족들이 보유한 주식은 감소했지만 계열사가 보유한 주식은 증가해 재벌 가족이 계속 지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에서 상호출자제한은 완화되었고 친기업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이마저 해제하고 부자와 대기업에 대한 세금 감면과 재벌과 관련된 규제들도 완화시킨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로비를 보면 재벌의 지배력이 엘리트 포획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포획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2010)에 기록되었듯 삼성의 입법, 사법, 행정부에 걸친 로비와 영향력은 민주적 자율성을 억제하고 국가자율성을 크게 훼손하고 침해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재벌의 지배력과 영향력을 재벌에 의한 포획으로 단순하게 처리해 아쉬움이 남는다. 

 

타이완 역시 토지개혁으로 지주계급이 해체되어 정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사적 이익집단이 없었다. 그러나 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한 한국과 달리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를 촉진한다. 타이완의 수입대체산업화는 두 가지 면에서 한국과 달랐다. 국민당 지도부는 사적부문성장이 타이완인들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국가소유부문 강화를 우선시했고 거대 제조업자와 지주들의 기득권이 정부 포획으로 이어졌다는 본토에서 경험은 대규모 자본가에 대한 제제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과거 일본인 소유 자산들을 사적부문에 불하하지 않고 국가소유로 묶어 비공산권 국가 가운데 가장 많은 국가소유부문을 만든다. 장제스는 기업가들에게 포획되지 않고 기술관료들에게 실질적인 의사결정권한과 새로운 정책수단을 위임한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타이완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실제 타이완에서 규제완화와 개혁은 민간부문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관료가 주도하고 실행한다. 한국과 필리핀에 비해 중앙정부와 정치엘리트가 지대추구와 부패에 포함되지 않도록 잘 통제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한국은 1980년대 초 10대 재벌이 전체 수출의 70%를 차지했으나 타이완은 중소기업이 전체 생산량의 70%를 수출한다. 국가정책의 차이가 서로 다른 산업구조로 이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타이완의 사례는 불평등이 낮은 사회에서 능력주의 관료제가 포획되는 경향이 적다는 것을 강하게 증명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토지개혁의 성패가 산업정책과 포획으로 이어졌는지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근대화와 민주화 이론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세 국가의 사례를 통해 근대화(modernization)와 민주화(democratization)의 관계를 논의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근대화 이론은 서구중심의 분석과 민주화와 경제발전의 상관관계를 설명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으나 토지개혁의 성공 여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민주화를 추동하는지 실증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특히 토지개혁이 갖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재조명한 점은 큰 성과이자 의의라 할 수 있다. 즉, 토지개혁의 성공으로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교육의 확대로 이어지고 이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이행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고등교육을 받은 시민들이 증가함에 따라 매표와 후견주의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한편 권위주의 정권도 매표 비용은 증가하나 유권자의 한계편익은 감소하는 한계상황에 부딪혀 후견주의 전략을 폐기하고 프로그램적 경쟁에 동참하게 만든다.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다시 민주주의 공고화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는 셈이다. 반면 토지개혁 실패는 토지엘리트에 의해 광범위한 후견주의와 엽관주의, 국가포획을 불러와 높은 부패수준을 유지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부패통제에 대한 민주주의 영향력은 경제발전수준보다는 경제불평등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할 수 있다. 또 비교정치 측면에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세 국가가 어떤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따라 국가정책이 영향을 받으며 결정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다. 앞으로 불평등 연구는 물론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경로와 사례 분석에 있어 이 책은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1] 필리핀에서는 기업가의 22.9%가 부패를 경영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로 응답했으나 타이완과 한국에서는 2.4%, 5.5%에 불과했다.

[2] 부패인식지수는 0과 10사이로 10에 가까울수록 덜 부패했다는 의미다. 2011년 필리핀의 CPI 지수는 2.6으로 한국(5.2)과 타이완(6.1)에 비해 부패 수준이 높다. 

[3] 세계은행 부패통제지수는 평균을 0에 놓고 표준편차는 1로서 1에 가까울수록 부패 수준이 낮다는 의미다. 2011년 필리핀의 CCI 지수는 -0.78로 세계 평균보다도 한참 낮다. 한국(0.45), 타이완(0.90)과도 격차가 크다.  

[4] 북한 자료에 따르면 1946년 3월 30일까지 100만 325정보가 몰수되어 98만 1,390정보가 72만 4,522가구에 분배되었다. 

[5] 미 군정은 남한에 진주하자마자 일본인 소유 토지를 미 군정 산하 신한공사 소유로 만든다. 1946년 3월 토지매각계획을 발표하지만 한국정부 수립할 때까지 매각을 미루자는 여론에 밀려 1948년 봄에서야 소작-경작자에게 1년 소출의 3배를 15년 분할납부하는 조건으로 매각한다. 

[6] 조봉암은 지주에게 평균수확량의 150% 보상, 수혜자는 평균수확량의 120% 상환을 초안으로 제시했으나 내각 심의에서 200% 보상, 200% 상환으로 후퇴한다. 지주 출신 한민당이 지배하는 국회 산업위원회는 300%로 보상과 상환을 올릴 것을 제안하나 1949년 6월 본회의에서 150% 보상, 125% 상환으로 법안을 의결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법안에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해 1950년 2월 보상과 상환 비율을 5년간 평균수확량의 150%로 수정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7] 막사이사이가 처음 제안했을 때 144헥타르 이상 모든 사유 농지가 재분배 대상이었으나 의회는 사유지의 경우 300헥타르, 기업은 600헥타르, 벼가 아닌 곡물을 재배하는 사유지는 1,024헥타르를 초과하는 경우로 기준을 느슨하게 올려 지주에게 유리하게 만든다. 

[8] 필리핀 의회는 토지 소유 상한선을 75헥타르로 올렸고 적정보상에 필요한 예산이 첫해 2억 페소, 다음 3개년 동안 3억 페소가 예상되었으나 고작 100만 페소만 할당한다.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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